가곡(歌曲)

(사)한국정가진흥회

가곡(歌曲)

전통가곡의 생성과 성장과정

관리자이메일

여러 사회적 환경과 변화에 따라 사대부 출신 양반들의 예악사상과 관련된 가곡은 이들에게 교양의 한 척도로 가름되었다. 조선후기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도 출신신분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높은 벼슬에 나가지 못한 서얼 중인 서리들은 가곡을 풍류의 수단으로 다루었다. 이들은 나아가 높은 경지에까지 가곡의 수준을 끌어 올렸기 때문에, 오늘의 가곡은 조선전기 이후 가곡활동에 뛰어난 가객, 곧 선가(善歌)들에 의해서 많은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통가곡은 고려시대 향악과 관련이 있다. 고려 향악의 성악곡 중 한 갈래가 발전되어 조선전기의 만대엽이 되었고, 만대엽은 빠르기의 차이에 의한 중대엽과 삭대엽으로 조선후기에 이어졌는데, 이것이 전통가곡의 원형이다. 만대엽 중대엽 삭대엽이란 성악곡이 서로 음악적으로 관련되었다는 사실은 1610년에 지은 {양금신보}의 '요사이 연주되는 대엽의 만 중 삭은 모두 정과정(鄭瓜亭)의 삼기곡(三機曲)에서 나온 것이다'라는 글에서 확인된다. 아울러 만대엽이 조선전기에 나타난 새로운 음악형식의 성악곡이었으며, 5장형식으로 된 만대엽은 중대엽의 형식과 같다.

 

이득윤(1553-1630)의 {현금동문류기}(1620)에서 '평조 만대엽은 여러 곡의 조종(祖宗)으로서 종용(從容)하고 한원(閑遠)하여 자연스럽게 평담한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만대엽은 임진왜란(1592) 이전에 성악곡으로 널리 연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금합자보}(1572)에 만대엽만이 기보되었고, {양금신보}(1610)에 만대엽과 중대엽이 기보되었으며, {현금동문류기}와 {금보신증가령}(1680)에서는 만대엽 중대엽 삭대엽이 모두 기보되어 있으므로, 만대엽은 임진왜란 이후 차츰 하향 추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중대엽과 삭대엽이 만대엽 대신에 임진왜란 이후 등장하였음을 아울러 알 수 있다.

 

{양금신보}에 의하면, 중대엽은 네 악조로 연주되었고, 삭대엽은 "여민락" "보허자" "영산회상"처럼 춤 반주음악으로 쓰였음이 확인되므로, 17세기 초기에는 중대엽이 삭대엽보다 성행하였음이 확실하다. 숙종(1675-1720) 전후에 편찬된 {백운암금보} {한금신보} {금보신증가령}(1680)에서 중대엽과 삭대엽의 제1 제2 제3이라는 파생곡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중대엽과 삭대엽은 17세기 후반에 서로 비슷하게 성행되었다. 한편 이후에 출판된 {연대소장금보}에 제1 2 3 중대엽에 얹혀서 노래로 불린 9편의 가사가 전하므로, 중대엽은 17세기말과 18세기초에 전성기를 이루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에 의하면, 18세기에 이르러 삭대엽은 중대엽보다 성행되었음이 드러난다. 그 이유는 느린 노래보다는 조금 빠른 노래를 더 좋아하였던 그 당시 사람들의 취향 때문이다.

 

<사료> 우리나라의 풍속가사에 대엽조가 있는데, 형식이 다 같아서 길고 짧은 구별이 없다. 그중 에 느린 것 중간 것 빠른 것 세 가지 조가 있으니, 이것은 본래 심방곡이라 이름하였다. 만대엽은 너 무 느려서 사람들이 싫증을 내어 폐지된 지가 오래고, 중대엽은 조금 빠르나 또한 좋아하는 사람이 적고, 지금 통용하는 것은 삭대엽이라는 곡조이다.

 

이렇듯, 조선전기에 성행되었던 만대엽은 17세기 초반부터 하향의 추세를 보이다가 18세기 이르면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 17세기 전반부터 성행하였던 중대엽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제1 2 3이란 파생곡으로 발전되다가 18세기 전반부터 차츰 하향의 추세를 보였고, 그 이후 사라지는 변천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17세기초에 무용음악으로 쓰이던 삭대엽은 중대엽처럼 17세기 후반부터 차츰 성행하다가 18세기 전반에 이르러 중대엽보다 새롭게 발전되었다.

 

임진왜란 직후인 광해군(1608-1623) 때부터 숙종(1675-1720) 중엽까지 17세기의 {양금신보}는 삭대엽이 무용의 반주음악으로 쓰인다고만 기록하고 있으며, 악보는 {현금동문류기}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평조와 우조라는 악조의 명칭이 밝혀진 삭대엽, 허사종이 연주하였다는 삭대엽, 자자대엽(滋滋大葉)이라고도 불린 삭대엽은 {현금동문류기}에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17세기 전기에 무용의 반주음악으로 연주되기도 하였던 삭대엽이 아직 풍류방에서 널리 성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삭대엽은 새로운 형태의 변주곡으로 발전되었다. 평조와 우조의 초수대엽 이수대엽 삼수대엽이 {신작금보}에 기보되었고, 평조 평조계면조 우조 우조계면조의 삭대엽 제1 2 3이 {금보신증가령}에 담겨져 있다. 이렇듯 삭대엽이 제1 2 3 또는 초 이 삼이란 명칭으로 파생되어 발전한 사실이 17세기 후반의 거문고악보에서 확인된 셈이다. 삭대엽 제2와 제3은 제1에서 파생된 변주곡인데, 이러한 현상처럼 삭대엽이 17세기 후반부터 차츰 풍류방의 가객들에 의해서 애창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숙종(1675-1720)말경부터 정조(1776-1800)까지 18세기의 삭대엽보를 담은 {한금신보} {연대소장금보} {어은보} 등의 거문고악보와 영조(1724-1776) 때 가곡의 가사를 모아서 엮은 김천택의 {청구영언}(1728)이나 김수장(1690년생)의 {해동가요}에 의해 삭대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8세기 전기의 삭대엽은 17세기 말기의 전통을 그대로 전승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변주곡으로 발전되었으니, 삭대엽 제4의 출현이 새로운 변주곡의 실례이며, {한금신보}의 우조삭대엽 제1 2 3 4가 현재 우조초수대엽 두거 삼수대엽 이수대엽이라는 견해가 있다.

 

18세기 말기에 이르면서 가곡에 나타난 삭대엽의 변주곡들은 농 낙 편이다. 농 낙 편이라는 변주곡은 {유예지}에서 농엽 우락과 계락 편수대엽의 명칭으로 기록되었다. 농엽의 농이란 변주곡은 후대에 평롱과 언롱으로 발전되었으며, 언롱의 제2 3 4 5장이 두거와 같다는 {학포금보}의 주석에 의하면, 농엽이 두거에서 파생된 변주곡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우락은 우조의 낙이란 뜻이고, 계락은 계면조의 낙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한편 편수대엽의 편이라는 변주곡은 삭대엽을 새로이 장단을 변주시킨 악곡이란 뜻으로 본다. 이렇듯 18세기의 가곡은 18세기 전기에 나타난 삭대엽 제4라는 변주곡 및 18세기 후반에 나타난 농 낙 편이란 변주곡에 의해 발전되었다.

 

순조(1800-1897) 때부터 광무(1897) 시작까지 19세기에는 가곡을 담은 {삼죽금보} 윤용구(1853-1939)의 {현금오음통론} {학포금보} 등의 거문고악보가 있고, 가곡의 가사를 담은 노래책으로 안민영과 박효관의 {가곡원류}(1876)가 있다. 이러한 거문고악보와 노래책에 나타난 19세기 전기의 가곡은 18세기 말기의 것을 전승하여 그 바탕 위에 새로운 형태의 변주곡을 첨가시킨 것이다.

{삼죽금보}에 나타나는 조림은 현행 가곡의 두거와 같고, 소이는 현행 삼수대엽이며, 소용은 삼수대엽에서 파생된 변주곡으로 밝혀졌다. 언락과 편락은 거문고의 반주에서 유현 7괘로 타므로 유현 4괘의 낮은 소리로 부르는 낙을 높이 질러서 부르도록 변주시킨 곡이며, 편락은 우락에서 편수대엽으로 넘어가는 단계의 악곡이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의 가곡으로 {현금오음통론}과 {학포금보}에 나타나는 중거와 평거는 이수대엽에서 파생된 변주곡이고, 반엽이나 우리말 밤엿의 한문 표기인 율당이란 명칭은 우조 가곡에서 계면조 가곡으로 넘어가는 악곡, 곧 반은 우조로 되었고 반은 계면조로 된 악곡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현행 반엽의 선율이 우롱과 계면이수대엽에서 차용된 것이며, 그 곡은 우롱과 이수대엽에서 파생된 변주곡이다.

 

여창가곡의 우락에서 계락으로 바뀔 때 불리는 환계락은 우락과 계락의 선율을 차용하였다고 하므로, 우락과 계락에서 파생된 변주곡이다. 따라서 중거와 평거는 이수대엽에서, 반엽은 우롱과 이수대엽에서, 언롱과 언편은 농과 편에서, 환계락은 우락과 계락에서 각각 파생된 변주곡이다.

 

현행 남녀창 가곡의 연주 끝에서 2중창으로 부르는 태평가는 이수대엽에서 변주되었고, 태평가의 선율을 한 옥타브 높게 변주시킨 곡이 청성자진한잎이라고 한다. 이처럼 현행 가곡의 여러 악곡들이 19세기 후반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17세기 삭대엽에서 발전하여 19세기말까지 약 3세기 동안에 현행 가곡의 뼈대가 형성되었는데, 가곡의 연주곡목 대부분이 변주곡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후기 음악양식의 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해동가요}의 고금창가제시에 의하면, 56명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숙종(1675-1720) 이후 영조(1724-1776) 사이의 가객들이다. 특히 이들 중 김천택은 {청구영언}의 편자이고, 김수장(1690년생)은 {해동가요}를 엮었으며, 이세춘은 1774년에 시조장단을 마련하였던 장본인들이다. 이후 장우벽 박효관 안민영 등이 활약하였으며, 그 아래로 하준권 최수보 명완벽(1842-1929) 하순일 하규일(1867-1937) 등이 있었다. 특히 1885년부터 하준권과 최수보에게 사사하고 이병성(1909-1960) 이주환(1909-1972) 박창진(1911-1949) 등을 지도한 하규일은 현행 전창(傳唱)되고 있는 모든 가곡(남 여창), 곧 남창가곡 84곡과 여창가곡 71곡, 모두 155곡을 비롯하여 여창의 창법을 가진 장진주를 남긴 분이다.

 

지금까지 전통가곡의 생성과 성장과정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가곡의 흐름을 대략 파악하였다. 이러한 전통가곡의 성장은 여러 가객들의 음악적인 삶과 가곡교육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당시 이름을 떨친 가객들은 자신의 가곡활동에 대하여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유기이다. 김유기는 자신의 가곡활동을 대구에 와서 한유신에게 전하여 전통가곡의 씨를 영남지역에 뿌린 장본인이다. 김유기에게 배운 한유신은 스승의 음악적 업적을 되새기며 끊임없는 노력으로 말미암아 뛰어난 가객(歌客), 곧 선가(善歌)로서의 위치에 올라섰고, 또한 11수의 시조를 남겼다.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http://user.chol.com/~husb/